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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9.06 할리 데이비슨, 문화가 살아있는 모터사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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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 데이비슨, 문화가 살아있는 모터사이클
시간을 알 수 없는 비행 나는 집에나 박혀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 노, 노, 노, 나는 로켓맨 우주에서 외롭게 나를 태워버리는 로켓맨 1903년 미국 중북부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출발한 세계적인 오토바이 회사 할리 데이비슨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축제는 지난 8월 31일 미국 가수 엘튼 존이 ‘로켓맨’을 열창하면서 막바지를 향했다. 바다같이 넓은 미시간 호수의 한 자락에 있는 밀워키 베테랑파크에는 전세계 수만 명의 오토바이 라이더들이 미국을 가로 혹은 세로로 질주하며 몰려들었다. 오토바이의 ‘성지(聖地)’ 밀워키는 8월의 마지막 며칠 간 온통 할리의 거친 엔진음에 뒤덮였고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친구가 됐다. 황량한 벌판을 달리며 자유를 부르짖던 영화 ‘이지 라이더’의 후예들은 21세기 초 아름다운 전원도시에 모여 그들만의 해방구를 연출해낸 것이다. 시대의 흐름은 많은 변화를 수반한다. 기업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극을 가하고 있고, 소비자는 새로운 흐름에 걸맞은 소비를 탐색하고 있다. 이런 상황아래서 브랜드는 상표구별의 기능 이상으로 확장되어, 소비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는 문화 Maker로 거듭나고 있다. 소비자와의 접점을 확장하여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파는냐’보다 더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산 모터사이클 Harley Davidson은, 브랜드를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의 표현 수단으로 인지시키고 충성도 높은 소비자와의 독특한 문화창출에 성공한 대표적인 예다.
할리 데이비슨 모터사이클(Harley Davidson Motorcycle)은 1903년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윌리엄 할리와 데이비슨 가의 3형제에 의해 처음 탄생한 후, 지난 100 여년 동안 일관된 스타일로 자유와 남성다움을 내세우며 Rider들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모터사이클의 명품이다. 무명의 할리 데이비슨이 미국 내 대표적 모터사이클 메이커로 자리잡은 배경에는 전쟁이 한 몫 한다.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선전포고로 발발 된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폴란드 침입으로 야기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할리 데이비슨은 각기 2만 여대, 9만 여대를 참전시켰다. 다른 모터 사이클이 험악한 전투 상황에서 대부분 나동그라진데 반해 할리 데이비슨은 최상의 성능을 발휘하며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미국 제일의 모터사이클 제조업체로서 승승장구하던 할리 데이비슨은 유럽계 모터사이클의 새로운 도전과 값싼 일본제의 대량 유입으로 회사가 넘어갈 위기에 처한다. 결국 다른 기업 `AMF`에 인수 합병되는 치욕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80년대 다시금 회사를 사왔고, 그 이후 매년 20%씩 매출 신장세를 구가하며 현재에 이르게 된다. 할리 데이비슨이 위기를 처했을 때 일등 공신은 할리 데이비슨을 사랑하는 마니아들이었다. 1983년에 결성된 `할리 오너스 그룹(HOG)`은 일종의 동호회다. 자신들이 아끼는 할리 데이비슨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모터사이클 투어링 행사인 `HOG랠리`를 개최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을 벌여 마침내 회사를 되살려냈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뉴욕, 새크라멘토 마일에서 캐나다 밴쿠버까지의 랠리가 있은 후 H.O.G.의 인기는 높아져 갔으며 1984년에는 완전한 랠리프로그램이 자리잡아 전국적인 행사가 되었다. 이 행사는 미국 전역의 모든 멤버들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3천명으로 멤버의 수가 한정되었으나 1985년에는 이미 그 수가 34지역의 6만 3천명으로 늘어났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랠리와 파티가 열렸다. 이 후 “Ladies of Harley”가 창립되었고, 사진과 각종 랠리와 행사일정 등을 다룬 H.O.G. Tales라는 잡지가 발행되었다. 현재 호그(HOG)는 전세계 7000개 지부와 64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오토바이 메이커 중 왜 할리 데이비슨일까? 답은 아마 엔진소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중한 엔진 음과 멋진 겉 모습, 유려한 곡선과 육중한 질감. 할리 데이비슨에는 진짜 유니크한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다. 할리의 엔진은 계속 진화되어 왔지만, 그 기본은 1909년 V트윈 엔진이 개발된 이래 바뀌지 않았으며 클래식한 외양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모터사이클다운 디자인을 내세운 할리 데이비슨은 거칠고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핵심으로 할리 라이더들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표출해주었다. 할리 데이비슨이 표방하는 이미지는 사회적 주류들 보다는 사회적 이단자를 자칭하는 부류들의 아이덴티티와 부합되었다. 이지 라이더의 주인공들처럼 검은색 가죽 재킷에 실버벨트를 두른 장발꽁지머리의 할리맨들은 할리 데이비슨만의 엔진소음을 내며 무리를 져서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고, 할리의 이미지는 곧 ‘깡패’ 같은 이미지로 직결되었다. 할리는 사회적 이단자들의 분모이자, 교집합이었다. 그러나 할리 데이비슨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1990년에 38세하던 HOG들의 평균나이는 2000년이 되자 45세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젊고, 터프하며, 남성적이었던 할리 데이비슨의 이미지 역시 노쇠하였다. 할리 데이비슨은 70년대 젊은이들의 상징이었지만 90년대 젊은이들의 상징이 되진 못했다. 할리는 할리 데이비슨의 이미지를 이끌고 있는 HOG들이 더 늙기 전에, 핵심 소비 계층인 20대와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여성들을 끌어들여 브랜드이미지를 쇄신시켜야 하는 필요성에 직면하였다. 할리 데이비슨이 작고 누구나 탈수 있는 가벼운 모형의 오토바이, 부웰 블래스트(Buell Blast)를 선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은 사회의 이단자들의 표현수단이 아닌 대중적인 취미로 확산되면서 회계사나 변호사 의사 등 사회의 주류층도 할리의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하였고, 그 무게 중심은 할리의 전형적인 모델보다 부웰 블래스트쪽으로 옮겨갔다. 전형적인 HOG들의 모습이 변해가고, 할리의 아이덴티티가 담겨있는 브랜드가 그 힘을 잃어가면서 할리 데이비슨은 총체적인 혼란에 겪어야 했다. 할리 데이비슨은 기존의 할리 매니아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운 타겟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균형잡힌 이미지로 자리잡히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였다. 기존의 깡패같은 이미지를 부드럽게 완화시키기 위해 자선단체와 HOG를 연계하여 자선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런 시도는 오토바이 타는 것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확립에 기여하였다. 또한 할리는 터프하고 남성적이며 조금은 아웃사이더같은 기존의 이미지는 유지함으로써 빌딩 속에서 생활하는 사회의 주류들에게 해방감을 줄 수 있는 탈출구이자, 과시감을 줄 수 있는 상징적이미지를 확보하였다. 할리 데이비슨은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여 자신의 색깔을 조용히 바꾸고 있는 것이다. 닷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할리 데이비슨은 아날로그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지 모른다. 시대를 역행하는 엔진 방식과 배기량에 비해 턱없이 낮은 성능이 그렇다. 그러나 100년 세월이 배어 있는 이 구식 모터사이클은 탑승자의 몸에 '할리 데이비슨' 문신을 새기게 만드는 절대적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다. |